필자는 필기구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특히 연필을 매우 좋아합니다. 만년필과 같은 품위있는 필기구도 있지만, 쓱쓱 종이에 써지는 연필의 질감과 필기감을 좋아합니다. 아날로그 시대는 저물었지만 연필의 힘은 여전합니다. 손으로 연필을 꼭 쥐었을 때의 그 감촉과 종이 위에 연필 심이 닿을 때 사각거림이 왠지 창작의 영감을 떠오르게 합니다.
260년 역사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회사 파버커스텔
연필하면 떠오르는 아주 오래된 독일의 문구 브랜드 '파버카스텔(FABER-CASTEL)'은 26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생산 회사입니다. 'Companion for Life'의 모토 아래 아이들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으로 130여 개국의 소비자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다. 필자는 파버카스텔의 연필과 색연필을 대학을 다니는 내내 사용했었고 지금은 그 색연필을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버카스텔은 1761년부터 9대째 이어오는 장수가족기업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연필을 '파버'라고 불렀을 정도로 연필계를 대표해 왔습니다. 마치 트렌치코트를 '바바리(Burberry)'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죠.
파버카스텔은 독일의 스타인에서 캐비닛 제조업자였던 카스파르 파버(Kaspar Faber)가 작은 공장을 세워 연필을 유통하던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독일에는 유난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필기구 명가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은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로써 1761년에 설립되어 260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미(Lamy)는 1830년, 스테들러(Staedtler)는 1835에 설립되었으며, 또다른 브랜드 펠리칸(Pelikan)은 1838년, 고급 만년필을 생산하는 몽블랑(Monblanc)은 1906에 설립되었고, 비교적 최근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로트링(Rotring)이 1928년에 설립되어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전통있는 브랜드의 필기구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파버카스텔은 말그대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브랜드가 된 육각형 연필
파버카스텔은 4대 회장 '로타 폰 파버' 때 세계적인 브랜드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로타르 폰 파버는 지금의 파버카스텔을 있게 한 주인공이자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는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일찌감치 무역에 눈을 떠 제조 공장을 현대화하고, 뉴욕과 파리를 중심으로 판매처를 확대했으며, 시베리아의 광산에서 질 좋은 흑연의 독점권을 따내 최고급 원료를 확보했습니다.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스스로를 제일 높은 위치에 올려놓겠다”며 짧은 시간에 연필의 퀄리티를 최상급으로 향상시켰고, 연필에 브랜드명을 넣어 세계 최초로 연필을 브랜드화하였습니다.
‘연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타 폰 파버는 책상 위에서 구르지 않는 육각형 연필을 개발했고 연필심에 경도 개념을 최초로 적용했습니다. 18단계의 경도 체제인 B(짙기)와 H(강도)로 나뉜 연필심의 세분화하였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4B, 2H 등의 명칭이 이 때 생기게 된 것입니다.
두 명의 기사와 로고 디자인
두 명의 기사가 연필로 된 마창을 겨루고 있는 진녹색의 파버카스텔 로고는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파버카스텔의 로고는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요?
1898년까지, 파버 가문의 소유였던 회사는 A.W.Faber라는 브랜드 네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가업의 상속녀 오틸리에가 알렉산더 주 카스텔–뤼덴하우젠 백작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의 조부 로타 폰 파버는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파버’라는 성을 회사명에 포함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교황청에 ‘폰 파버 카스텔’이라는 새로운 성을 허가 받습니다. 그리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파버카스텔’이라는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탄생하게 됩니다.
1905년 알렉산더 백작은 카스텔(Castell)이라고 불리는 최고급 품질의 연필을 출시하였습니다. 카스텔 연필의 차별성을 위해서 알렉산더 백작은 그가 복무한 부대 깃발의 상징색인 짙은 녹색을 연필에 도색하였으며, 이 진녹색의 연필은 수 년 동안 파버카스텔의 대표적인 상품이 됩니다. 알렉산더 백작은 품질로 모든 것을 승부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연필 기사” 이미지를 광고 모티브로 의뢰하였습니다. 이 광고 이미지는 오랫동안 파버카스텔 제품의 상자와 케이스에 장식되었습니다.
후에 이 이미지는 구식으로 간주되어 사용되지 않다가, 1990년대 초 8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이 새로운 기업 이미지를 창출 할 때, 다시 한번 파버카스텔 브랜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 “연필 기사” 이미지는 회사 로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티스트들의 연필
피버카스텔(FABER-CASTEL)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설레게 하는 이름입니다.
파버카스텔의 연필에 매료된 1883년의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괴테, 어니스트 헤밍웨이, 칼 라거펠트도 마찬가지죠. 만화 작가 칼 바크스와 독일 화가 파울 클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네오 라우흐, 칼 라거펠트까지 세계적 아티스트들은 파버카스텔의 연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 연필은 딱 알맞은 굵기에 목공용 연필보다 부드럽고 질이 좋아. 검은색이 아름답고 특히 큰 그림을 그릴 때 아주 좋더라고. 이 연필은 부드러운 나무를 사용하고 겉은 짙은 녹색으로 칠했는데 하나에 20센트야.”
1883년 빈센트 반 고흐가 친구이자 스승인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여기에서 묘사된 녹색 연필이 바로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제품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카스텔 9000을 너무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활기찬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파버카스텔 없이는 어떤 것도 디자인하고 싶지 않다”
전 샤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가 했던 말입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칼 라거펠트는 패션 일러스트를 그릴 때 파버카스텔 수채 색연필을 즐겨 쓰기로 유명했습니다.
파버카스텔의 철학
파버카스텔은 한우물 경영으로 유명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커지면 본사를 대도시로 옮기고 공장은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하곤 합니다. 계열사가 늘어나 다양한 산업의 품목으로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파버카스텔은 두 세기 반이 넘게 고향을 지키며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파버카스텔은 지금도 장인정신과 과학을 결합해 혁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공장을 체코로 이전하면 임금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지만 30년 이상 숙련된 노동자를 위해 공장을 유지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한 자루의 연필로 시작해서 샤프, 볼펜, 만년필, 색연필 등 그들도 나름대로 사업 확장을 해왔고 최근엔 화장품 산업(www.fc-cosmetics.de)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파버 카스텔 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연필을 제조하는 회사이면서 가장 많은 종류의 연필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파버 카스텔은 오늘도 전세계 15개 공장, 100여개 지점, 5,500여명의 직원들이 연간 20억개 이상의 연필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한지 오래지만 전세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파버 카스텔의 연필로 문자를 익히고, 셈을 하고, 개인적인 일기를 씁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어떻게 보면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연필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다시 연필을 찾곤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무리 키보드와 타블렛이 대세여도 고흐가 밑그림을 그리고, 괴테가 단어 하나를 쓰고 지우던 연필만이 가진 손맛만은 기계가 쉽게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의 CEO 다니엘 로거는 '성장 이전에 직원의 행복과 공동체의 번영을 먼저 생가하는 태도'가 지금의 파버카스텔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성공한 가족 기업에는 지속가능성, 사회적 책임, 근면이나 겸손, 진심과 같은 인간의 미덕을 포함한 좋은 가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도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연결고리로 보고, 성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9대째 이어온 파버카스텔이 발전하게 된 것은 몇 번의 멋진 도약이 아니라 과거에 옳다고 판단한 일을 계속해온 끈기일 것입니다. 모토를 따르는 모든 작은 발걸음이 더해져서 만들어낸 지속적인 최적화, 이것이 파버카스텔 기업의 철학인 것입니다.
파버카스텔의 사회적 책임
30여 년 전, 브라질 남동부에는 1만㏊의 소나무 숲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막처럼 허허벌판이던 이 지역에 숲이 조성되자 동물이 뛰어다니고,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연간 20억 자루의 연필을 생산하는 파버카스텔은 해마다 15만t의 목재를 필요로 합니다. 파버카스텔은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황폐한 땅을 개척하여 산림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처음 심은 소나무는 목재로 쓰려면 15∼20년이 걸리는데 단기적인 이익을 창출하기엔 너무 긴 시간입니다.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잘 조화시킨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나무를 베고 재목을 만들기 위한 제재소가 생겨나자 500여 개의 일자리가 늘었습니다. 또 이 숲은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고 있다는 의미로 UNFCC(유엔기후변화협약)의 인증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이 프로젝트는 브라질을 거쳐 콜롬비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파버카스텔의 8번째 회장인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이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파버카스텔 잉크를 들이킨 영상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어린이용 제품에는 친환경 수성페인트를 사용하고 나무에는 방부제를 첨가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파버카스텔의 디자인
디지털 만능 시대에도 꾸준히 사랑받는 독일 필기구의 명가, 파버카스텔. 그들의 연필 한 자루에는 260여 년간 한결같이 고수해온 장인 정신과 가족 경영을 통해 확고히 다져온 윤리적 경영 마인드, 사회적 책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기업의 가치와 환경을 소중히 하는 파버카스텔은 단순히 공산품 제조 기업이 아닌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이어가며 사회에 공헌하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파버카스텔 9000으로 창작의 기쁨을 느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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